가까이에 난청인이 있는데, 그가 농인도 비장애인도 아닌 경계선에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의사소통을 할 때 수어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청각장애인”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없어 자신의 장애를 어떻게 건강하게 다뤄야 하는지 습득할 기회가 매우 적어 보였어요. 이에 비장애인들과의 차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해 핸디캡에 배로 부정적 자극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장애 그 자체로 갖는 불편감보다 스스로와 주변환경이 장애를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더 큰 고통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올바르고 건강하게 장애를 수용하고 장애 정체감을 갖는 것의 중요성을 느껴왔고, 이 주제를 좀 더 뎁스있게 공부해보고 싶어 당분간은 ‘장애 수용’, ‘장애 정체성’, ‘재활심리’ 등의 주제를 지속적으로 다뤄볼까 해요!
장애란?
먼저 장애의 정의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Olkin 박사가 창안한 장애-긍정 치료(Disability-Affirmative Therapy) 에서는 장애를 개인의 기능과 환경 사이의 부조화로 인하여 발생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장애’는 장애가 발생하는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여 정의될 수 있는 유동적인 개념이라는 설명이 기억에 남아요.
장애 정체성이란?
장애 정체성을 다루기에 앞서 먼저, 자아 정체성의 개념을 다뤄봐야할 것 같아요. 자아 정체성이란, 개인이 속하고 있는 집단에 대한 소속감 또는 일체감과 함께 고유한 존재로서 개인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정체의식을 말한다고 해요. 이런 정체의식은 자신이 속한 사회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경험을 통해서 형성되며, 생애 주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합니다. 자아 정체성은 다양하고 중첩된 역할 정체성들로 나타나는데요. 예를 들어 교사인 동시에 아빠의 역할도 있으며, 아들인 동시에 누군가의 친구로서의 정체성도 존재하는 것이죠. 따라서 장애 정체성은 장애를 가진 개인의 다양한 자아 정체성들 중 또 하나의 자신을 의미하는 정체성입니다.
장애 정체성은 보편적으로 ‘자신의 장애에 대한 주관적 감각과 심리적 태도’로 정의되는데요. 혹자는 장애 정체성을 “자신이 더 이상 부끄럽거나 열등한 존재가 아님을 알고 당당히 장애인으로서 세상에 나오는 심리적 해방의 경험이며, 동시에 장애 문제를 정치적 사회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깨닫는 것”으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1) 심리적 차원의 장애 정체성
심리적 차원에서의 장애 정체성은 ‘장애 수용’에 초점을 맞추는데요. '수용'이란 불행스러운 사건이나 상태를 참고 받아들이는 소극적인 차원에서부터 기꺼이 다른 선택범위가 있더라도 이를 선호한다는 적극적인 차원의 의미까지 포괄한다고 해요. 따라서 장애수용은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즉,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절하되지 않으며 장애를 감추기 위한 긴장과 열등감으로 괴로워하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익섭(2003)은 자기수용으로서의 장애 정체성이 개인적인 정체성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의 장애에 대한 의미를 인식하며 집단적이고 보편적인 정체성 또한 갖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곧 장애 정체성은 장애인이 사회에서 억압된 자신을 발견하는 개인적 경험인 '특수성'과 그러한 장애인으로서 경험하는 억압이 세계 어느 곳에나 공통된 문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보편성'의 복합적인 결과인 셈이죠.
(2) 정치적 차원의 장애 정체성
장애 정체성은 심리적인 영역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데요. 정치적 행동주의, 장애권리운동 등과 관련된 장애 정체성의 4가지 속성을 정리해드릴게요. 1) 일상생활에서 장애로 인해 차이가 발생한다고 인식한다 2) 사회정치적 환경에서 발생하는 장애는 또한 사회정치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다 3) 장애의 문제를 혼자만의 고민으로 남기지 말고 다른 사람들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4) 다른 장애인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앞서 심리적 차원에서 다룬 장애 정체성의 집단적 정체성(장애문제에 대한 보편성 인식)의 개념보다 더 나아간 상태를 장애 정체성의 정치적 속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네요.
장애인으로서의 강한 집단적 소속감과 정체성은 장애의 사회문제를 정치적으로 조직화하여 집단 대응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집단적 장애운동의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3) 문화적 차원의 장애 정체성
장애 정체성은 하나의 장애인 집단이 가지는 '문화'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문화'란 구성원에 의해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양식이나 생활양식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뤄낸 물질적, 정신적 소득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의식주를 비롯해서 언어, 종교, 학문, 예술, 제도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인 것이죠. 즉,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삶의 양식으로 세대간에 전승되면서 보존되고 발전하기도 하는 게 문화인지라, 기본적으로 소속 집단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있을 때 문화도 존재할 수 있다고 여겨지곤 하죠.
현실적으로 장애에 대한 자부심을 갖기 힘든 사회구조 속에서 장애인만의 문화라고 칭할 수 있는 정체성을 찾기가 어렵다고 하는데요. 그럼에도 '농문화'를 문화적 차원에서의 장애 정체성의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농인의 경우, 그들만의 언어가 존재하고 이미 사회문화적인 관점에서 소수집단으로 이해되고 있는 측면이 있어요. 농인들은 열등한 존재가 아닌 수화라는 다른 언어체계를 가진 타문화권의 사람들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문화와 연대감을 갖기도 하는데 바로 이 지점을 농인들의 문화적 장애 정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장애유형별 자조모임이나 연대체 중 그들만의 삶의 양식을 공유하고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커뮤니티도 문화적 장애 정체성으로 볼 수 있다고 해요. 정치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각종 문화예술, 스포츠 활동 등을 함께 향유하기도 하며 그 속에서 그들의 소통방식과 삶의 양식을 공유하고 새내기 장애인들에게 계승하기도 하는 운동들을 전부 문화적 차원의 장애 정체성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장애의 모델
정체성이라 함은 개인의 의지로 생겨나는 게 아니라, 개인을 둘러싼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으로 이미 개인에게 내재되어 있는 장애 정체성을 어떻게 바르게(?) 조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요. 이 점에 대해서 '장애의 모델'이 약간은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장애의 모델은 장애를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틀(framework)을 뜻하는데요. 예를 들어 장애를 신이 행한 결과로 보는 '도덕적/종교적 모델', 장애를 질병으로 보는 '의료적 모델', 장애를 사회적으로 구성된 현상으로 보는 '사회적 모델', 인권의 관점에서 장애를 보는 '인권모델', 장애를 문화의 관점에서 보는 '문화모델', 장애를 생산성에 대한 문제로 보는 '경제적 모델' 등 다양한 프레임이 존재한다고 해요.
여기서 Olkin(2007)은 임상적으로 유용한 모델로 도덕적/종교적 모델, 의료적 모델, 사회적 모델을 꼽았는데요. 특히나 상담장면에서 장애인의 적응실패를 사회적 편견과 낙인, 차별과 배제 탓으로 보는 사회적 모델에 근거해 개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내담자에게 특정한 모델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해요. 내담자의 언어를 통해 자신의 장애를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지 파악하고, 해당모델이 갖고 있는 장점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상담전략을 짤 것을 제시하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내담자의 장애 모델을 바꿔버리는 게 아니라, 이미 그가 갖고 있는 장애에 대한 관점을 그대로 존중하는 방향인 것이죠. 예를 들어, 내담자가 도덕적/종교적 모델의 관점에서 장애를 인식하고 있다면, 장애를 신의 선한 목적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다루며 내담자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와 목표를 찾도록 조력하여 장애에 인내하는 힘을 길러주는 식~?!
글을 마무리하며, 장애를 긍정한다는 것은 장애의 좋은 점을 생각해낸다는 게 아니라 장애로 인한 불편과 어쩔 수 없는 비장애인과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인지할 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회적 약자가 심리적 취약성이 높은 이유는 소외받고 배제되는 크고 작은 경험들과의 상호작용 결과라고 생각하는데요. 개개인의 차별적인 발언과 대우 뿐만 아니라 거시적인 배제 경험들이 장애인으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장애인의 건강한 장애 수용을 위한 노력이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전방위적으로 이뤄져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학습 자료]
(1) 장애 정체감으로서의 장애 자부심, 그리고 장애 문화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
한국장애인복지학 Journal of Disability and Welfare, vol. 15
(2) 재활심리 분야에서의 장애 정체성 개발을 위한 장애-긍정 치료 적용에 관한 탐색
재활심리연구 Journal of Rehabilitation Psychology Vol.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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